본문 바로가기

에세이스트의 방/문화 이야기

'마더', 우리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그 실체를 한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수많은 엄마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에게 엄마란 한 때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자식 빼앗기고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던 그 분이고, 갖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부엌 한 켠에 서서 행주로 눈물을 훔치는 것으로 핍박을 참고 살아오셨던 그 분이기도 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셨던 "자장면이 싫다"고 하신 그 분이기도 하며, 남편을 위해 제 머리카락을 팔아 손님 대접을 하더라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던 바로 그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이미지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엄마란 너무나 자식을 사랑한 나머지 배우자의 자식을 빼앗고 핍박하던 바로 그 시어머니고, 가족을 위해서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다른 가족의 것을 모성의 이름으로 빼앗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그 분이기도 하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탄생시키고 보듬어준 신적인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과된 신적 책무의 뒤틀림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가진 한 인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소재가 늘 우리네 문화의 중심축에 서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 속에 숨겨져 있는 양가적인 속성이 갖는 파괴력 때문이다.

하여 우리에게 지금 봉준호 감독이 '마더'라는 영화를 통해 들고 온 엄마가 자못 충격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실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이 양면적인 얼굴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무수히 봐왔고 또 여전히 지금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양춘희(이미숙)를 통해서, 막장에서 남편을 잃고도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내는 전형적인 개발시대 엄마들의 표상을 보기도 하지만,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나혜주(김해숙)를 통해서, 자신의 친 자식을 위해 입양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빗나간 모성을 보기도 한다.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가 우리 드라마의 주축이었던(이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 드라마는 한 마디로 엄마들의 세상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간의 결혼이야기를 중심 모티브로 가져가는 가족드라마의 경우 그 결혼을 허하는 위치에 선 엄마라는 존재는 늘 드라마의 극성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역시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드라마는 엄마와 엄마가 부딪치지만, 멜로드라마는 엄마와 결혼 당사자가 부딪치곤 한다는 점이다.

'마더'의 김혜자가 출연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한자(김혜자)는 딸 결혼문제를 두고 삶의 방식 자체가 상이한 고은아(장미희)와 불꽃 튀는 대결을 보인다. 자식을 앞에 두고 벌이는 기 싸움. 이것은 가족드라마로 포장되고, 교양인으로 포장되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볼만한 야생의 싸움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잔뜩 품위를 지키면서 실은 살벌한 싸움구경을 보여주는 가족드라마가 재미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성의 대결이 아닌가.

이러한 대결구도는 가족드라마의 틀에 박힌 클리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는 엄마라는 신성불가침의 존재, 즉 자식에 대한 끝없는 희생으로서 갖게 된 이른바 면책특권이 자리하고 있다. 엄마의 싸움은 늘 정당하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는 여기까지다. 엄마가 '자식을 위한, 혹은 가족을 위한' 같은 수식어를 떼어버리게 되면 그 부여된 면죄부 또한 흔들리게 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한 때 논란이 된 김한자의 독립선언은 대중들의 엄마를 바라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대중들은 그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엄마가 뿔났다'는 사실 바로 이 엄마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려는 김수현 작가의 도발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드라마라는 한계 속에서 끝까지 그걸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하긴 가족드라마라는 견고한 틀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엄청난 실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엄마가 뿔났다'가 슬쩍 보여주었던 바로 그 '똑바로 바라본 엄마라는 존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도발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엄마라는 존재에서 억압되어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된 이미지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그 엄청난 사랑 이면에 숨겨진 끔찍할 정도로 질깃질깃한 에너지(때론 폭력적으로까지 드러나는)이고,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 이면에 숨겨진 여자라는 존재로서의 엄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때로는 하나로 연결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더' 속에 등장하는 도준(원빈)의 엄마는 위기에 빠진 자식을 위해 동물적인 모성을 발휘한다. 그 모성은 우리가 지금껏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발견한 것처럼 잘 포장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법적인 선을 넘어서 무조건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뭐든 하는 모성은 끔찍스럽고 충격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영화는 이 엄마라는 존재 위에 여자로서의 한 부분을 포착해낸다. 섹스를 하는 진태(진구)와 여자 친구를 숨어서 바라본다거나, 고물상 주인의 배에 올라타 둔기로 내려칠 때 피가 터져 나오는 장면은 상징적이지만, 늘 엄마로서만 자리해온 한 여자의 본능을 그려낸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대중들에게 있어서 엄마의 이런 모습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직시하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다. 만일 '마더'의 시점이 도준의 엄마가 아니라 진태나 형사 같은 타인의 시선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이 엄마를 우리가 흔히 드라마 속에서 보아왔던 악역으로 치부하며, 편안하게 영화를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들에게 그런 편안함을 제공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민엄마로 각인되어 있는 김혜자의 기성 이미지를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정적인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엄마의 또 다른 실체를 바라봐야 하는 충격, 불쾌감은 대중들이 늘 소비해왔고 앞으로도 소비하고픈 엄마의 이미지를 배반했다.

'마더'의 엄마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간 문화가 엄마를 다루는 시선이 단선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마는 늘 모성애의 존재로서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나뉘어졌고, 이편이 우리가 봐왔던 진짜 엄마의 실체이며, 저편은 실체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응징되는(그럼으로써 실체가 아니라고 말해지는) 그런 존재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마더'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모성의 실체라는 것을 아프게도 보여준다. 우리에게 엄마는 세상 모두가 믿지 않아도 자식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주는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자식이자 내 자식의 반려자를 핍박할 수도 있는 존재다. 또한 그녀는 한 자식의 엄마이지만 또한 한 사람의 아내이기도 하고, 자신 또한 핍박받았던 한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엄마라는 이름 속에 부과된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해보면,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분열시킬 정도로 힘겹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에 부과되어 당연하게 여겨지는 희생이라는 책무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지어야 될 짐을 대신 그녀들이 지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트라우마처럼 엄마란 존재를 늘 고결한 모성으로 떠받드는 이면에는 어쩌면 그 희생을 당연한 어떤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우리의 이기심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에세이스트의 방 > 문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1) 2011.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