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는 동해안의 어느 바닷가에 있었다. 도시의 폭염을 피해, 도시의 돈 냄새를 피해, 달아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잔뜩 찡그린 채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텅 빈 백사장 위에 설치된 천막 옆에서 우리는 비에 젖은 생쥐마냥 떨면서 빗물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집으로부터 3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외딴 곳에 잘 곳도 없는 우리들에게, 주머니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돈을 톡톡 털어서 마시는 소주 맛이란, 막막함과 설렘이 뒤섞인 기막힌 맛이었다.

그 대책 없는 상황은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천막 안에서 흘러나오는 쿵쿵 대는 음악에 맞춰 우리는 천막 바깥에서 춤을 추었다. 소주에 취해 빗물과 바닷물에 취해. 자연 속에 적당히 자신을 방치해버린 듯한 그 기분. 그것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눈을 깜박이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낙관할 수 있었던 청춘의 기분이었고 그것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갖는 그 느낌 자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갔었던 그 동해안의 바닷가는 이미 사그라져버린 청춘의 모래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천막이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차려진 건물에 카페가 자리했다. 남미풍의 음악이 바다의 백사장까지 침투하는 그 곳에 앉으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저 편의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묘한 감상에 젖어 비와 바다가 만들어내는 축축함을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에 버무려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앉아 부르고뉴 피노누아 정도가 글라스에 채워져 있다면 금상첨화. 우리의 여행은 20년의 세월만큼 달라져 있다.

자연에 가까웠던 청춘의 우리들은 어느새 문화라는 이름 속에 둥지를 튼 인공적인 안전함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나이든 우리들에게 온 변화이면서, 동시에 나이 먹어버린 우리네 환경의 변화이기도 하다. 우리와 분리되면서 자연은 우리의 안식처이면서 도전이 되었다. 자연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불안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여행이란 끝없는 이 양가감정 속에 놓여져 있다. 도시 속의 안전함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문화라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훌쩍 그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러나 자연 속에서의 야생적인 하룻밤을 버텨내기가 어렵다.

TV라는 매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대리체험이라는 점에서, 여행은 바로 이런 양가감정에 놓여있는 우리들을 흔들어놓는 소재다. 우리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갈 수도 있고, 범인들은 갈 수 없는 히말라야의 ‘산’에 오를 수도 있으며,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오지에서부터, 물 속 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들을 대리체험할 수 있다. 맥루한이 매체가 감각의 확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TV를 통해 실제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세세한 순간들을 목도할 수 있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심해로 들어갈 수도 있다. 대리체험을 가짜라 치부하는 것은, 영속하는 진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일 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분명 감각적으로 체험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지금은 여행을 낯선 세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때, TV가 매개하는 여행 역시 그 여행의 한 부분이 되는 시대다.

'원격현전'이 TV가 가진 가장 놀라운 경이라는 점에서 TV의 공간을 포착하는 대부분의 영상들은 여행과 다르지 않다. '이 곳에 앉아 저 곳을 본다는 것'이 이 여행의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따라서 날 것의 여행을 보여주는 것은 TV로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니 여행 자체가 쇼의 소재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섯 남자들이 1박2일 간 떠나는 여행을 오락적인 쇼의 형식으로 포착한 '1박2일'은, 여행 그 자체를 대리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행이 환기하는 어떤 기억을 대리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생고생의 기억이다.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여섯 명의 캐릭터는 바로 우리들의 분신이고, 그들이 저 야생에 나가서 복불복 게임을 하며 노숙을 하는 건 우리들이 잊고 있던 야생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한 겨울에 텐트에서 잠을 자거나, 계곡의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여행을 앞두고 갖게 되는 혹은 자연을 앞에 두고 갖게 되는 그 불안감과 편안함의 양가감정을 담고 있다. 이것은 저 20년 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청춘의 대책 없는 낙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힘겨움과 고통스러움이 웃음과 즐거움으로 화하는 것. 그것이 이 쇼가 주말 밤 떠나지 못한 자들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떠나게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다.

한편 20년 전과는 달리 현재 나이 먹어버린 우리가 하는 여행이란 고작 자연 속에서도 편안한 도시의 인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산과 바다에 자리한 고급 펜션들과 호텔들은 자연을 찾은 이들이 다시 인공으로 들어감으로 해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이율배반적인 여행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산 속에서 길을 잃어 오랜 시간 동안 헤매다 겨우 발견한 대형마트의 불빛에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 아닌가. 그러니 여행의 또 한 가지 측면은 단지 자연과의 일체감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의 다른 생활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떠나온 도시와 다를 것이 없지만, 이질적 공간이 주는 변주의 즐거움이 있다.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여행 보내드리고, 대신 그 곳에서의 하룻밤을 지내는 컨셉트의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이러한 여행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쇼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도착해서 짐을 풀고, 놀다가 밥을 함께 차려먹고, 함께 자고 일어나 다시 밥 차려먹고 놀고 하는 것의 반복이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주는 판타지는 의외로 크다. 일과 욕망에 점철되어 살아가는 도시생활 속에서의 우리네 삶이 일하고 일하고 일하는 그 연속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밥 한 끼 제대로 가족들과 차려먹는다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삶 속에서 이런 여행이 갖는 평범함(삼시 세 끼 먹고 놀다가 푹 자는)은 때론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프로그램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행의 양상을 보여주는 접근방식이 다르지만, 그 형식과 외형은 동일하다. 그것은 모두 TV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1박2일'이 야생을 외친다고 해도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야생의 여행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공적인 대리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야생으로 떠나자"고 프로그램은 소리치고 있지만, 바로 그 소리침으로 인해 우리는 TV 앞에 앉아있다는 것. 우리에게 어쩌면 여행이란 이제 이런 것으로 변해 있는 지도 모른다. 가끔씩 오지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그 곳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TV의 채널을 만지작거리며 안도감을 갖곤 한다. 이곳도 내가 떠나온 곳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 매개된 체험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어쩌면 이미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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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그 실체를 한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수많은 엄마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에게 엄마란 한 때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자식 빼앗기고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던 그 분이고, 갖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부엌 한 켠에 서서 행주로 눈물을 훔치는 것으로 핍박을 참고 살아오셨던 그 분이기도 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셨던 "자장면이 싫다"고 하신 그 분이기도 하며, 남편을 위해 제 머리카락을 팔아 손님 대접을 하더라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던 바로 그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이미지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엄마란 너무나 자식을 사랑한 나머지 배우자의 자식을 빼앗고 핍박하던 바로 그 시어머니고, 가족을 위해서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다른 가족의 것을 모성의 이름으로 빼앗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그 분이기도 하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탄생시키고 보듬어준 신적인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과된 신적 책무의 뒤틀림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가진 한 인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소재가 늘 우리네 문화의 중심축에 서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 속에 숨겨져 있는 양가적인 속성이 갖는 파괴력 때문이다.

하여 우리에게 지금 봉준호 감독이 '마더'라는 영화를 통해 들고 온 엄마가 자못 충격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실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이 양면적인 얼굴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무수히 봐왔고 또 여전히 지금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양춘희(이미숙)를 통해서, 막장에서 남편을 잃고도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내는 전형적인 개발시대 엄마들의 표상을 보기도 하지만,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나혜주(김해숙)를 통해서, 자신의 친 자식을 위해 입양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빗나간 모성을 보기도 한다.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가 우리 드라마의 주축이었던(이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 드라마는 한 마디로 엄마들의 세상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간의 결혼이야기를 중심 모티브로 가져가는 가족드라마의 경우 그 결혼을 허하는 위치에 선 엄마라는 존재는 늘 드라마의 극성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역시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드라마는 엄마와 엄마가 부딪치지만, 멜로드라마는 엄마와 결혼 당사자가 부딪치곤 한다는 점이다.

'마더'의 김혜자가 출연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한자(김혜자)는 딸 결혼문제를 두고 삶의 방식 자체가 상이한 고은아(장미희)와 불꽃 튀는 대결을 보인다. 자식을 앞에 두고 벌이는 기 싸움. 이것은 가족드라마로 포장되고, 교양인으로 포장되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볼만한 야생의 싸움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잔뜩 품위를 지키면서 실은 살벌한 싸움구경을 보여주는 가족드라마가 재미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성의 대결이 아닌가.

이러한 대결구도는 가족드라마의 틀에 박힌 클리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는 엄마라는 신성불가침의 존재, 즉 자식에 대한 끝없는 희생으로서 갖게 된 이른바 면책특권이 자리하고 있다. 엄마의 싸움은 늘 정당하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는 여기까지다. 엄마가 '자식을 위한, 혹은 가족을 위한' 같은 수식어를 떼어버리게 되면 그 부여된 면죄부 또한 흔들리게 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한 때 논란이 된 김한자의 독립선언은 대중들의 엄마를 바라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대중들은 그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엄마가 뿔났다'는 사실 바로 이 엄마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려는 김수현 작가의 도발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드라마라는 한계 속에서 끝까지 그걸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하긴 가족드라마라는 견고한 틀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엄청난 실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엄마가 뿔났다'가 슬쩍 보여주었던 바로 그 '똑바로 바라본 엄마라는 존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도발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엄마라는 존재에서 억압되어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된 이미지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그 엄청난 사랑 이면에 숨겨진 끔찍할 정도로 질깃질깃한 에너지(때론 폭력적으로까지 드러나는)이고,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 이면에 숨겨진 여자라는 존재로서의 엄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때로는 하나로 연결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더' 속에 등장하는 도준(원빈)의 엄마는 위기에 빠진 자식을 위해 동물적인 모성을 발휘한다. 그 모성은 우리가 지금껏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발견한 것처럼 잘 포장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법적인 선을 넘어서 무조건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뭐든 하는 모성은 끔찍스럽고 충격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영화는 이 엄마라는 존재 위에 여자로서의 한 부분을 포착해낸다. 섹스를 하는 진태(진구)와 여자 친구를 숨어서 바라본다거나, 고물상 주인의 배에 올라타 둔기로 내려칠 때 피가 터져 나오는 장면은 상징적이지만, 늘 엄마로서만 자리해온 한 여자의 본능을 그려낸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대중들에게 있어서 엄마의 이런 모습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직시하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다. 만일 '마더'의 시점이 도준의 엄마가 아니라 진태나 형사 같은 타인의 시선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이 엄마를 우리가 흔히 드라마 속에서 보아왔던 악역으로 치부하며, 편안하게 영화를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들에게 그런 편안함을 제공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민엄마로 각인되어 있는 김혜자의 기성 이미지를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정적인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엄마의 또 다른 실체를 바라봐야 하는 충격, 불쾌감은 대중들이 늘 소비해왔고 앞으로도 소비하고픈 엄마의 이미지를 배반했다.

'마더'의 엄마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간 문화가 엄마를 다루는 시선이 단선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마는 늘 모성애의 존재로서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나뉘어졌고, 이편이 우리가 봐왔던 진짜 엄마의 실체이며, 저편은 실체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응징되는(그럼으로써 실체가 아니라고 말해지는) 그런 존재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마더'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모성의 실체라는 것을 아프게도 보여준다. 우리에게 엄마는 세상 모두가 믿지 않아도 자식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주는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자식이자 내 자식의 반려자를 핍박할 수도 있는 존재다. 또한 그녀는 한 자식의 엄마이지만 또한 한 사람의 아내이기도 하고, 자신 또한 핍박받았던 한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엄마라는 이름 속에 부과된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해보면,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분열시킬 정도로 힘겹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에 부과되어 당연하게 여겨지는 희생이라는 책무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지어야 될 짐을 대신 그녀들이 지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트라우마처럼 엄마란 존재를 늘 고결한 모성으로 떠받드는 이면에는 어쩌면 그 희생을 당연한 어떤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우리의 이기심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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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포 외할머니댁을 찾아가는 길은 늘 낯설고 두려웠다. 버스가 당도하는 시각은 늘 어둠이 내린 한밤중이었고,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나룻배를 타려면 빛 한 자락 찾기 힘든 캄캄한 길을 걸어야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올려다본 하늘 위에 펼쳐진 별들의 향연. 어머니는 거기 떠 있는 별들을 손으로 가리켜 이리 잇고 저리 이으면서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오리온... 그 별들은 지금도 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까.

물론 그 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지만, 이제 도시의 빛에 멀어버린 눈은 그 별을 바라보지 못한다. 별들은 분명 지금도 이야기를 건네고 있지만 도시의 소음에 먹어버린 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머니가 조곤조곤 들려주시던 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둠 속에 갇혀 두려워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꿈으로 채워주곤 했다. 그 때 알았다. 이야기는 바로 꿈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별자리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하늘의 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별들은 그저 그렇게 흩어져 있는 것일 뿐,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어머니처럼 그 별을 보고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뿐이다. 아무 의미 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것은 사람만이 가진 능력이다. 아주 오래 전, 하늘의 별빛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 두려움의 하늘을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하늘로 변모시킨 이야기꾼은 사실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무 의미 없이 죽어버리고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었을 테니까. 그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꿈이라는 것을 꿀 수 있었을 테니까. 이야기는 실로 꿈의 다른 말이다.

별자리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들이야말로 저 하늘의 별처럼 그저 흩어져 무엇이 될 지도 모르고 숨 쉬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 존재들이 어떻게 삶의 목표를 만들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 우리는 인생이라는 커다란 빈 도화지를 하나씩 받았고, 그 위에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야기들을 써나갔던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별자리 이야기다. 당신 스스로 꿈꾸었던 인생이 이야기처럼 그 속에는 들어 있었고, 그 이야기가 일러주는 대로 당신은 부지불식간에 빛 한 줄기 없어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뒤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암흑의 길 위를 한 발작씩 걸어왔다. 두려움조차 없이. 어떻게? 이야기가 당신의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이 힘겨워질 때, 고개 숙인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바로 그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는 일이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도시의 불빛에 멀어버린 눈을, 도시의 소음에 먹어버린 귀를 찾기 위해 한참을 달려 인적 드문 어딘가로 떠나도 좋을 것이다. 그 곳에 서서 어린 시절부터 늘 거기서 이야기의 빛을 쏟아내던 그 별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 그 상상의 힘을 복원하는 것. 새해가 새로운 꿈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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